People_옛날 사람이 있었다

Editor 정미환 Photographer 김경수, 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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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초가 있던 정원, 이태준의 [수연산방] <무서록>을 편다. “내가 조선집을 지음은 이조 건축의 소박, 중후한 맛을 탐냄에 있음이랴.” 20세기 초의 문인 이태준은 걸출한 산문가였다. 그는 1933년 성북동에 한옥을 한 채 지어 가족들과 함께 13년을 살았다. 작가는 집을 사랑했고, 집은 문장에 스몄다. 1930년대 쓴 수필들을 ‘두서 없이’ 모은 수연산방책, <무서록>의 ‘목수’는 아예 집을 짓는 과정에 대한 얘기한다. 개울을 내려다보는 임야에 택지를 마련한 후, 이태준은 새로운 양식들을 덧붙이면서도 전통 한옥에 충실한 집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젊은 장인들 대신 ‘도포 입고 갓 쓴’ 늙은 목수들을 불렀다. 공사의 시일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초복에 시작해 말복을 통해 치목을 하며 달구질을 하며, 참으로 집 귀한 맛을 골수에 느끼다.”
이태준은 완성된 집을 위해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는 당호를 정했다. 대청마루 오른쪽으로 누각처럼 튀어나온 마루 한 칸에는 ‘문향루’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교 넘치지만 다정한 수연산방의 인상은 문향루 덕이 크다. 아亞 자 문양의 난간 너머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에서 이태준은 수많은 글을 썼다. 집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사건들, 그대로 잊혀졌어도 좋을 순간들이 행과 행 사이 작은 매혹으로 기록되었다. ‘미닫이에 풀벌레 와 부딪는 소리가 째릉째릉’ 울리는 한편, ‘그림 하나를 옮겨 걸고, 빈 접시 하나를 바꿔 놓고도 그것으로 며칠을 갇혀 넉넉히’ 즐기는 시간도 있었다. 사철나무와 감나무가 우거진 마당에 열두 자가 넘는 파초를 키우기도 했다. “지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큰 파초는 처음 봤군!”라고 우러러보는 것이다. 나는 그 밑에 의자를 놓고 가끔 남국의 정조를 명상한다.” 파초의 ‘푸르고 싱그러운 그늘 아래’에서 그는 행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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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산방에서 지내던 시절을 제외하면 이태준의 인생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아홉 살에 고아가 된 후 가난하고 외로운 시절을 보냈고, 1946년에는 가족들을 데리고 월북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환영받았으나 몇 해 지나지 않아 숙청이 시작됐고,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소문만이 무성하다. 탄광 마을에서 그를 닮은 노인을 봤다는 이야기도 있고, 함흥의 벽돌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세상을 떴다는 말도 있다. 남한 역시 그의 존재를 부정했다. ‘이태현 가옥’이라 불리던 집이 이름을 되찾은 건 1988년 월북 작가들의 해금 조치가 시행된 후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이태준의 고종 손녀는 이곳에 찻집을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찻집 이름은 당호를 이어 수연산방이 되었다. 마루 밑 댓돌 위에 다시 신발들이 쌓이기 시작했고, 문향루에 앉은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정원을 바라본다. 파초가 사라진 아름다운 정원을.